석오이동녕선생 선양회 임원 워크숍 개최

“관후장자(寬厚長者) 석오이동녕선생”
김용부 기자 | 입력 : 2024/07/13 [21:41]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 서문동상임대표
(남서울대학교 행정지원처장)와 나라사랑 국민운동본부(총재 권영욱, 본부장 염남훈)에서는 석오 이동녕 선생의 사상과 철학 및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임원 워크숍이 지난 73일 오후 천안 원성동 다와 세미나실에서 개최하였다며, 향후 선양회의 활동을 더 넓히는데 힘쓰고자, 여성위원회를 조직하였다고 밝혔다.

 



서문동상임대표(남서울대학교 행정지원처장)는 지난 20192월 선양회 창립 이후 선양회에서는 석오이동녕선생의 나라사랑 애국정신을 이어받고 일평생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생애와 사상, 철학 및 업적을 배우고,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중심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정부를 수립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우리 민족 최초로 도입하신 선생님의 업적을 세미나, 언론 등 방송과 강의, 등을 통하여 알리는데 선양회 임원 및 회원들이 최선을 다하여 왔다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경영하시며 유지시켜 오신 석오 이동녕 선생님의 발자취를 조명하며, 선생님을 임시정부의 수호신, 우리 민족의 등불과 같은 분이라는 선생님의 일반적인 평가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자 선양회 임원 워크숍을 개최하였다며,

 



석오이동녕선생은 "일평생을 교육자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애국계몽 국권회복운동독립운동으로 나라사랑 민족사랑을 실천하신 이동녕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 등 3차례 의장과 임시정부의 주석 4차례대통령    5차례의 국가수반을 지내시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체계적인 독립투쟁을 막후에서 진두 지휘하셔서 대한민국 건국 활동에 지대한 공을 세웠는데도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여 우리 역사교과서에 이름 석자 찿을수 없다며, 선생님의 나라사랑, 민족사랑의 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지난해부터 천안시(박상돈시장)에서 석오아동녕선생서훈상향을 위한 천안시범시민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박상돈 천안시장, 선양회 서문동상임대표)를 구성하여, 천안시 행정기관(시청, 구청, , 각동 행정지원센터), 과 천안시 교육기관(,,,대학) 중심으로 석오이동녕선생 독립서훈(2등급) 1등급 서훈상향 서명운동을 실시중인바, 현재 약 6만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서명에 참여하였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워크숍의 주제 발표에 나선 김중영 선양회 공동대표겸 연수원장 (경일감정평가법인 충청지사 이사)” 너그럽고 후하며 점잖은(寬厚長者) 이동녕 선생이란 제목으로 1925년 한기악 선생이 석오 이동녕 선생을 뵙고 느낀 점을 개벽지(개벽 제62, 192581) 실은 글을 소개하며 선생님의 성품에 대하여 발표하며, 한기악선생은 석오이동녕선생님 생전에 선생님을 관후장자(寬厚長者, 너그럽고 후하며 점잖은 사람)라 칭한 글로 생전의 선생님을 표현한 유일한 글이라고 밝히며, 한기악선생의 글에서 선생님과의 인연, 성품과 독립운동의 애환이 담긴 내용을 풀이하여 주었으며, 한우순선생은 부제 선생의 천성은 강직하고 강경하기 때문에 찿아오는 청년의 과실만 보면 용서없이 꾸지람을 하셨는데, 석오 선생은 그 뒤로 잘 타일러 무마하였습니다. 그 지방 청년들이 부제는 엄격한 아버지 같고 석오는 자상한 어머니 같다고 하였다.”는 일화를 설명하였다.

 

 

이어서 나라사랑국민운동본부 염남훈 본부장 및 선양회 공동대표는 오늘날 우리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분열과 갈등의 시개를 종지부를 찍고, 석오아동녕선생의 소통과 화합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통합를 이루는 것이며, 또 하나는 대한민국이 초저출산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이대로 간다면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소멸되는 국가기 될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다며,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우리나라의 든든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둘이둘낳기운동이 바로 오늘날 우리시대의 최고의 과제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선양회 공동대표인 한국노인복지연합회 남명우본부장,  신성철 전 천안주민자치연합회장, ()천문에너지 이정희회장, 홍익외식사업부 손영재총괄이사, 국민통합실천연합 천안시여성회 강명화회장, 충무병원 김남용봉사회장 등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이어 나갔다.

 

이어서 선양회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석오이동녕선생님을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서훈상향 서명운동과 둘이둘낳기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여성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초대 여성위원장에 홍익외식사업부 손영재총괄이사를 선임하였다고 밝혔다.

 

손영재여성위원장은 그동안 선양회에서 선생님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여 왔지만, 아직도 선생님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며, 여성단체등을 통하여 선생님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알리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며 수락인사를 하였다.

 

선양회 서문동 상임대표는 석오이동녕선생의 정당한 평가를 받아 서훈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상향 추서해야 함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살리는 길이며바로 역사통일을 이루는 것이라며, 석오이동녕선생님의 서훈 상향은 받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

 

 

너그럽고 후하며 점잖은(寬厚長者) 이동녕 선생

(필자 한기악, 개벽 제62, 19250801)

 

석오 이동녕 선생을 뵈옵기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 7월에 내가 러시아에서 유학하려고 시베리아로 향하였을 때에 니코리스크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거의 1년 동안이나 한집에 붙어 있으면서 많은 지도를 받고 여러 가지 괴로움을 끼쳤습니다.(191546)

 

선생은 충청남도 목천 출생으로 일찍이 경성에 올라와 가정에서 수학하다가 해외 풍조와 국내 현상에 느끼는 바가 있어 상동교회에서 목사로 있던 전덕기와 같이 여러 가지 애국운동에 착수하게 되었고 특히 기억할 것은 하와이에 있던 강천명이라는 청년이 보낸 돈 5원을 기초로 하야 청년학원이라는 중학교를 설립하야 내외에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좋은 청년을 많이 양성한 것과 다수의 동지들과 연결하야 청년학우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야 현재까지 그 정신이 그래로 남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세상사 여의치 못함(일제의 강제 병합)을 따라 1910년 겨울에 성제 이시영씨 5형제분과 같이 서간도로 이사하여 육영사업에 전력하다가 다시 블리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부제 이상설과 가치 여러 가지 방면으로 협력하야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한우순 말은 부제 선생의 천성은 강직하고 강경하기 때문에 찿아오는 청년의 과실만 보면 용서없이 꾸지람을 하셨는데, 석오 선생은 그 뒤로 잘 타일러 무마하였습니다. 그 지방 청년들이 부제는 엄격한 아버지 같고 석오는 자상한 어머니 같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그 성격을 전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은근하고도 침중한 태도, 강직하고도 혼후한 성격, 광채 있는 안광, 우렁찬 음성, 누구에게든지 한번 보면 왠지 친근함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게 합니다. 고집이 대단하고, 생핀잔 잘 주기도 유명하지만 말을 조리있게 하시고 설득력이 있어 한번 본 사람에게는 호감을 주 는 것이 특색이라 할 것입니다.

 

전덕기씨가 작고한 소식을 들은지 얼마 안돼서 부제선생도 건강이 악화되어 만억만리에서 돌아가시니(1917) 그때 선생의 마음이야 말하지 않으셔도 알 것습니다.

 

후 외로히 울분의 세월을 보내다가 기미년 삼일운동이 있기 전에 성제 이시영씨와 같이 연해주에서 상해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동경에 있다가 상해로 가게 되어 다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이 다시 만남이 어제 같 것만 무심한 세월은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십수년 객지 생활로 늘 건강치 못하신 것은 오래 전부터 인데 이삼년 전부터 더욱 심신이 쇠약하셨다 합니다. 병세가 등한히 할 수 없어서 동지들의 강권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 요양중이라 하오나 아직도 쾌차치 못하셨다다 합니다.

  

꿈속에서 뵙 것은 한 두번이 아니나 안부 편지조차 막히어 지금은 주소까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금년 57세로 노친과 기타 가족은 원산에 사시고 그 장자 의식군은 일본 산형고등학교에 재학중입니다. 여러차례 부탁을 저바리기 어려워 새책으로 인사를 드리오니 멀리 선생의 쾌차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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